자족하는 마음의 비결 빌립보서 4:10-19 6월 24일 주일설교
한 주를 주 안에서 승리하고 예배에 자리에 나오신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자! 다같이 저와 함께 외쳐 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승리자다’ ‘여호와 닛시’
제가 매번 말씀드리지만 주일 예배에 참석하는 일은 엄청난 승리인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만난 지가 벌써 많은 시간이 지났습니다. 저는 처음 여러분을 만났을 때 여러분의 신앙생활의 정도나 수준을 모두 알지는 못했지만 어느 정도 가늠하고 있었기 때문에 오늘의 여러분들을 보면 기적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신앙은 성장해야 합니다. 몇 년 전이나 지금이나 신앙상태가 어린아이 상태에 머물러 있다면 그 영혼은 영적으로 죽어 있는 것이지 살아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여러분의 영적 성장도 날마다 지속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멈추면 안 됩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의 충만한 데 이르기까지 성장해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여정을 가는 동안 성장이 멈추는 분이 한 사람도 없기를 기도합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말씀은 고전 1:18 말씀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를 한없이 미련하고 어리석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이 짧은 인생을 두고 우리를 보니 그럴 만도 할 것입니다.
주 5일제 휴무로 얼마나 놀기 좋습니까? 들로 산으로 다니며 우리를 불쌍히 여길 것입니다. 그러나 미련한 것은 우리가 아닙니다. 그들은 이 바람같은 짧은 인생만을 보는 영적 어두움에 묶여 있는 것이요, 우리는 영원한 생명, 처음도 끝도 없는 영원한 안식을 예비하고 있으니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평안과 안식을 누리는 것으로 행복을 느끼시죠? 얼마나 복된 인생인지 알 수 없습니다. 믿으시지요?
오늘 말씀을 읽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빌 4:10-19 말씀을 교독하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현재의 삶에 자족하는 마음을 가지고 계십니까? 자족하는 마음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우리는 무엇엔가 만족하려고 애를 씁니다. 내가 무엇으로 만족하고 있는가, 무엇을 추구하고 있는가를 가만히 되돌아보면 나의 가치관이 어디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현대를 만족을 모르는 시대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무엇엔가 굶주려 있는 듯이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안간힘을 씁니다. 사회가 발전할수록 사람들은 무엇엔가 쫓기고 자족하는 마음은 갈수록 희미해져 갑니다.
심리학을 연구하는 학자가 사람들의 불만족의 미스테리를 조명하는 글이 있어 잠깐 소개합니다.
흔히 우리는 불만족 하면 숱한 실패를 겪거나 좌절을 맛 본 사람이 가지는 감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불만족을 느끼는 사람들은 희한하게도 자신이 원하던 목표를 달성했거나 불만이나 좌절감을 크게 맛보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왜 그토록 원하는 것을 얻고도 좌절감을 느끼는 것일까?” “왜 사람들은 끊임없이 남과 자신을 비교하는가?”
불만족이라는 감정은 아이러니하게도 무수한 갈등과 실패를 겪은 사람들 보다 오히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성취하고, 갖고 싶은 것을 손에 넣은 사람일수록 심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원했던 일을 하고, 집을 사고, 승진을 하고, 더 높은 자리에 올라 갈수록 자신이 이루어 놓은 것들을 의심한다고 합니다.
그 상황을 즐기기는 커녕 오히려 불편해 했으며, 항상 뭔가 부족하다는 생각에 시달린 답니다. 목표를 달성하고 원하는 것을 갖게 되면 만족하는 것도 잠시, 곧바로 다음 해야 할 일을 찾았고, 그것이 끝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직 충분하지 않다며 더 큰 만족을 좇았는데 결코 그들의 성장과 변화가 충분치 못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만족이 결코 성취나 소유의 문제가 아니다”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저자는 연구하기를 사람들이 성품에서 나타나는 낮은 자존감이 끝없이 불만족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자기 존중감이 낮거나 외부에서 인정을 구하고, 칭찬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상처를 받았을 때 만족을 느끼기란 쉽지 않다고 합니다. 이 때 불만족이 하나의 습관이 되고 성격으로까지 굳어져 버리는데, 이 때문에 충분하다는 감정을 가질 수 없게 만들고 만족할 줄 모르게 만드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 글을 읽으면서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에게도 이와 같은 부류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불만족한 상태의 삶을 계속하는 것이 합당한 것일까요? 저는 이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십자가를 전인격적으로 체험하는 거듭남이 없이는, 우리는 이러한 성품을 결코 떠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 속에서 보듯이 그리스도 안에서는 능치 못함이 없나니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이 말씀을 굳게 믿습니다.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능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을 다스리는 능력입니다. 만족하려는 욕심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말씀한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나는 내게 능력주시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불만에 휘둘리지 않고 궁핍에도 처할 수 있고, 풍요에도 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배고픈 곳도 갈 수 있고, 배부른 곳도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혹시라도 이와 같은 처리되지 않는 성품이 자신 안에 자리하고 있다면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으십시오.
성령께서는 우리의 모든 성품을 아십니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구체적으로 알고 계십니다. 우리를 설계하시고 DNA구조까지 꿰뚫고 계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우리의 어떤 부분이 잘못되었는지를 아시는 것입니다. 주께서 만지시면 이 모든 잘못된 자존감은 반드시 치유되는 역사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롬 8:26에서 성령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우리를 도우신다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우리가 마땅히 구할 바를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성령 안에서 기도하면 성령께서 어디를 손대야할 지를 아시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9장에 보면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 만난 사건이 나옵니다. 그는 유대 공회원으로서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예루살렘으로 끌고 올 목적으로 대제사장의 공문을 받아 다메섹으로 갑니다. 가다가 하늘에서 갑자기 강한 빛이 그를 둘러 비취며 예수님께서 직접 음성으로 그에게 다가오십니다.
그는 거기에서 뒤집어 집니다. 그 후 아라비아 광야에서 3년 동안 주님과 깊은 교제를 하며 하나님의 사람으로 새롭게 정결케 하는 작업이 진행된 것입니다. 그는 그때 성령의 집중적인 치료와 그를 재창조하는 거듭남의 시간들을 통해 사울에서 새로운 바울로서 사명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의 3년 동안의 공적사역 이후, 바울이 이방인의 복음 전하는 사도로써 가장 크게 쓰임 받은 것은 그 3년 동안의 성령의 치유와 가르침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도 성령 안에서 확실하게 뒤집어 지십시오. 어정쩡하게 뒤집어지면 이것도 저것도 안 됩니다. 확실하게 뒤집어져서 성령의 강한 역사로 인하여 내면적인 모든 잘못된 성품을 고침 받아서 바울처럼 쓰임 받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무시로 성령안에서 기도하십시오.
저도 성령 받은 후 3년 동안 말씀과 기도에 전무하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수많은 변화를 겪었습니다. 제가 안좌에 있을 때 농사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거듭난 이후 농사일은 육체적으로 너무 힘이 들어 도저히 하나님 일과 겸하여 할 수 없어서 기도하였을 때 주민자치센터에 작은 일자리가 났습니다.
그곳에서 하는 일은 자치센터의 모든 기구와 공간들을 관리하는 일이었는데 사무실은 5평 정도의 작은 공간이었지만 하루종일 나 혼자 말씀 보며 기도하기에는 너무나도 좋은 최적의 공간이었습니다. 저는 이곳에서 3년을 근무하였지요.
그 3년은 내 일생을 새롭게 바꾸어놓은 시간이었고 지금의 나로 변화시켜 준 시간들이었습니다. 그 시간들이 없었다면 어떻했을까를 생각해보면 오묘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게 됩니다. 성경을 많이 읽는 시간이었고 말씀과 관련된 독서를 많이 하게 되었고 기도와 말씀 묵상만 붙들고 사는 시간들이었기에 너무나도 주님께 감사할 뿐이었습니다.
3년이 지난 후에 미련없이 직장을 그만 두었고 신학교를 다니기 위해 목포로 나온 것입니다. 오늘에까지 목사님 밑에서 믿음을 키우고 목회자로 세워지기까지 혹독한 시련과 훈련가운데에 있었습니다.
말씀과 기도로 훈련받으면서 모난 성품이 다듬어지고 십자가에서 죽은 내 자아가 무엇인지 어렴풋하게나마 알게 됐습니다.
빌립보서는 바울이 로마 감옥에 2차로 투옥되어 빌립보 교회 교인들에게 쓴 마지막 서신중 하나입니다. 바울이 많은 교회를 세웠지만 그가 2차 선교여행을 하면서 마게도냐 지방에 개척한 첫 교회가 빌립보교회입니다.
그가 사실은 2차 선교여행을 아시아로 가려고 작정했지만 행 16장에 나타나듯 성령께서 환상으로 마게도냐 사람을 보여주면서 마게도냐로 와서 복음을 전해달라고 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시아로 가려던 당초 계획을 변경하여 마게도냐로 가게 됩니다. 마게도냐는 지금의 터키입니다.
거기에서 두아디라 성 옷감장사 루디아를 만나게 되고 그가 바울로부터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어 그와 더불어 빌립보교회를 세우게 됩니다. 그쪽 마게도냐 지역에는 다른 지방과는 달리 여자들이 개인 재산을 소유하는 등 사회적으로 많은 특권을 누리고 있었다고 역사적 자료에서 살펴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이 루디아를 만난 것도 그렇고, 빌립보교회를 이끌어 가던 유오디아와 순두게, 글레멘드도 여자인 것을 보면 그 당시나 지금이나 교회에서 여자들의 역할이 참 크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니 바울이 기뻐하는 것은 빌립보교회가 자신의 선교적 사명에 최선을 다해 돕고 있다는 것에 감격해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재정적으로 넉넉한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선교를 다닐 때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그의 쓸 것을 공급해 주어서 감사하며 하나님께 더욱 풍성함으로 빌립보교인들을 축복해 주실 것을 기도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이 빌립보서를 쓸 때 그는 인생의 마지막을 느꼈던 것일까요. 편지 내용이 다른 서신서와 달리 매우 잔잔한 필체로 쓰여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빌립보서를 읽어 보면 매우 이해가 쉽고 자기고백과 간증이 많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이 편지를 쓴 지 2년 후 순교를 당하게 됩니다. 예수를 만난 지 31년 만에 그는 천국으로 이사를 간 것입니다. 그에게 31년 동안의 사역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고난의 시간이었지만 예수를 만난 감격과는 비교할 수 없으므로 이 모든 고통 가운데에서 기쁨을 누리며 주어진 선교적 사명을 감당했던 것입니다. 그의 복음 전도가 아니었다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었을지 알 수 없네요.
초대교회 상황에서 바울이 없었다면 기독교 복음은 아마도 쇠퇴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당시 베드로는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일하였고 바울은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쓰임 받음으로 기독교가 전 세계에 확산되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 그 모든 것을 통찰하시는 하나님께서 그를 택하신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자, 그럼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기전 그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잠깐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빌 3:4-7까지 봅니다.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내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히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이 말씀 속에 그의 지난 삶의 궤적들이 고스란히 나타납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이처럼 명문가문이었고 귀족중의 귀족이었습니다.
그가 말하듯 그는 당시 초대교회 교인들을 잡아 옥에 가두고 그들을 죽이는데 내어주는 사람으로 예수님과는 대적관계에 놓여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예수를 믿지 않았다면 유대인의 공회원으로서 평생 풍족한 삶의 질을 누리며 대제사장의 반열에까지 오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우스운 얘기같지만 예수 만난 이후에 육신적으로 망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승리한 자입니다. 그는 예수를 만난 이후로 그의 지나간 삶을 배설물로 여길 정도로 예수 만난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빌 3:8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예수를 만난 것은 밭에서 일하다 보화를 발견한 농부와 같은 심정인 것입니다. 재산을 다 팔아서 그 밭을 사고 그 보화를 내 것으로 만드는 농부와 같은 것입니다. 마 13:44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또 그는 예수 만나서 얼마나 많은 고난과 핍박과 환난 중에서 지냈었습니까? 고후 11:23-27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 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그는 이처럼 예수 만나서 육신적인 괴로움을 당했습니다.
또한 그는 육체적인 고통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고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고린도후서 11장 28절에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것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골로새서 1장 24절에서도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해 그 모든 고난을 자신의 육체에 채운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괴로움이 기쁨이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도 이와 같은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신지요. 그가 사도여서 그렇게 말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된 자는 누구나 교회 사랑이 특심한 것을 믿으십시오. 교회가 곧 그리스도의 머리요, 몸이기 때문에 성령께서 교회 사랑하는 마음을 반드시 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교회 사랑은 우리 모두가 품어야 할 가장 귀한 사명 중 하나입니다. 여러분 중 혹 교회를 단지 머물다 가면 그만인 공동체로 여기신지요. 교회가 건물이라고 생각하고 계시는 분은 혹시 없으시겠지요. 교회라는 공동체는 구원받은 거룩한 무리들이 모인 살아있는 공동체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모퉁이돌이 되셔서 성령 안에서 서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지체들이 서로 지어져 간다고 엡 2:21절 이하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교회는 내가 복만 구하러 나오는 나와 따로 떨어져 있는 공동체가 아닌 내 영혼이 쉼을 얻고 예배를 통해 회복의 은혜를 맛보고 성령안에서 연합해 세워가야 하는 여러분 영혼과 몸의 일부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교회를 내 몸처럼 사랑하게 될 때 그때에야 바로 교회는 이 땅에서 지상천국의 터를 다지게 돼 있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나에게 무엇을 해줄지에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내가 교회를 위해 어떻게 희생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십시오. 여러분의 희생은 사람을 위해 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 영광을 위해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모든 것을 다 기억하십니다.
우리가 구해야 할 복은 굳이 구하지 않아도 여러분의 희생속에서 꽃피우게 되어 있습니다. 마 6:26부터 33절까지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들의 백합화를 보라 그들은 농사하지도 길쌈도 하지 않아도 먹이시고 입히시거늘 하물며 너희 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너희 천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저는 작년에 교회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을 얻고 주님께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에배소서 5:24-25말씀을 묵상하다가 나는 갑자기 오열하기 시작했습니다. 새벽예배 후 집에 가면 말씀 한 구절씩 외우면서 묵상하는데 25절 말씀에서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는 말씀 앞에서 성령의 강한 내적 음성이 나를 깨우치며 책망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소리를 낼 수 없어 이불을 뒤집어 쓰고 입에 틀어막고 얼마나 통곡을 했는지 모릅니다. 회개를 한 것이죠. 교회 사랑하는 마음이 식어가는 내 마음을 성령께서 채찍질하신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 교회를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자신을 내어주심같이 희생하라는 명령앞에 나의 부족과 허물 때문에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저에게 주신 중보기도의 사명도 소홀히 했던 저 자신에 대한 회한이 견딜 수 없도록 밀려 왔습니다. 전심으로 하지 못하는 전도로 가슴이 아팠습니다. 저도 인간인지라 때로는 인간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내 욕심을 따라 생각하며 행동할 때가 있는 것이지요. 주님께서 중보기도의 사명을 주셔서 교회를 위해 기도하게 하셨는데 영적으로 힘들어지니까 모든 것을 소홀히 여겼던 내 죄를 깨닫게 하셨고 회개하게 하셨던 것이죠. 그 이후 교회가 우리에게 이토록 소중한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교회는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결코 교회 때문에 잘못된 편견이나 판단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내 영혼이 천국가기까지 이 땅에서 내 희생을 드려 세워야 할 거룩한 공동체임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이 사실을 망각하는 순간 영혼은 말할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질 것입니다. 여러분이 소속된 교회가 이 땅에서 든든하게 세워지기까지 여러분의 눈물어린 희생과 헌신이 필요할 뿐입니다.
지금까지 여러분은 눈물어린 헌신을 해오셨습니다. 개척교회 상황에서 참으로 힘든 시간을 인내로 잘 견뎌 오셨습니다. 그 모든 것을 주님께서 기억하십니다. 성령께서 일하실 수 있도록 기도로, 나를 헌신하고, 봉사로 헌신하고, 물질로 헌신하고, 전도로 헌신하고, 맡긴 직분과 사명으로 헌신하는 것이 결코 헛된 수고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마음 가장 깊은 곳에 돌에 새기듯 새겨 놓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말씀 속에서 바울이 비록 옥에 갇혀 있었지만 빌립보 교인들은 바울의 선교를 돕기 위하여 희생적인 헌신을 지속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희생적인 헌신이 그들의 공로가 되거나 자랑이 되어 버리면 그곳에 하나님의 영광은 자리할 곳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십자가에서 죽은 몸들입니다. 우리의 공로는 잊어버리고 우리의 죄만 기억하고 자랑하시기 바랍니다. 갈 2:20말씀을 믿으신다면 우리는 이미 십자가 안에서 주님과 함께 죽었고 우리의 자아나 자존심은 없는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내 안에서 사시는 것이 됩니다.
본문 말씀 14절에서 바울이 자신의 괴로움에 동참하는 빌립보 교인들을 보며 격려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같이 한번 읽어 볼까요.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예하였으니 잘 하였도다’ 지금 우리 교회 목사님도 사명의 감옥에서 말할 수 없는 괴로움에 직면해 있습니다. 목사님의 그 괴로움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자신의 육체에 채우는 일인 것입니다. 교회가 이 땅 위에서 사단의 권세를 깨뜨리고 어떠한 위협에도 흔들리지 않는 교회로 세워지기 위한 희생을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갈기갈기 찢기시고, 상하시고, 피 흘리신 이유도 구원의 방주인 교회를 사랑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괴로움에 동참하고 참예하는 여러분들은 위대하신 것입니다. 승리자인 것입니다. 한 끼 금식을 선포하고 그것을 내 육체에 채우는 일이야말로 그리스도의 희생에 동참하는 것이고 목사님의 괴로움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렇게 서로가 연합하고 그 희생의 바탕위에서 빛이 나는 것입니다.
또 바울을 위해 그의 쓸 것을 끊임없이 공급해 주는 그들의 헌신을 눈여겨 보십시오. 그들이 풍족해서 헌신한 것이 아니라고 앞에서 이미 언급했습니다. 그들이 가진 것으로 서로 나누는 것이지요. 바울은 그것으로 자신을 위해 돕고 있는 교인들로 인하여 풍성함을 누리고 있다고 감사하고 있습니다.
17절을 보면 바울은 그들에게 선물을 구한 것이 아니요 그들로부터 받은 것에 감사하여 하나님께 축복하기를 구한다고 했습니다. 목회자는 그의 쓸 것을 공급받고 성도들을 위해 끊임없이 축복기도를 합니다. 19절에서 바울이 말합니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말하고 있듯이 목회자의 축복기도는 하늘 문을 여는 열쇠가 되는 것입니다. 희생적인 헌신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는 여러분들의 삶을 통해 반드시 열매로 나타날 것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어서 풍부에 처할 수도 있고 또는 비천에 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으로 흔들리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도 그 화려했던 과거의 삶을 생각해 보면 현실의 그 궁핍을 견딜 수가 없을 것이지만 그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자족하는 마음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그런 자족하는 마음은 성령 안에서 변화된 새로운 마음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도 현재 자족하는 마음이 없다면 성령께 간절히 구하십시오. 그리고 말씀과 부딪치십시오. 말씀과 정면으로 만나면 누구나 말씀의 능력 앞에서 자신의 허물과 죄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는, 죄를 이긴, 모든 세상을 이긴 영적인 부요하심이 있습니다. 우리는 부요하신 그리스도와 영적 연합을 통해 그 안에서 부요함을 누려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외적인 환경에 좌우되지만 우리는 어떠한 외부적 환경이나 조건들의 영향을 받지 않는, 평안과 감사의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바울도 그리스도 안에서 이러한 일체의 비결을 배웠던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낮아지심(빌 2:8)을 본받은 것이며,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온 그의 헌신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오늘의 말씀 속에서, 어떠한 상황과 형편 속에서도, 복음을 위한 삶을 견지하면서 철저히 하나님을 의지하였던 바울의 삶을 본받아,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신 그 분의 뜻을 이루는 저와 여러분의 삶이 되시길 바랍니다.
일리노이주 에반스톤 감리교회를 목회하던 아네스트 티틀(Ernest Tittle) 목사님은 미국 사회의 죄악상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회개를 촉구했던 설교자이다. 그는 1953년 8월 어느 주일, 설교까지 잘 마치고 이튿날 새벽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의 최후의 설교는 이렇게 끝을 맺고 있다.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는 사람에게는 축복이 있습니다. 그는 높은 소망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자기의 인생을 바치고 하나님의 목적을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축복이 임합니다. 그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모든 개인적인 일을 하나님의 일로 믿는 사람에게 축복이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삶의 어두운 시간에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축복을 받습니다. 그는 흔들리지 않는 소망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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