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형상을 회복하자 시편 23:1-6
오늘 예배드리러 나오신 모두를 주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옆 사람과 교제하겠습니다. 지난 한주 동안 평안했습니까? 그리스도인은 주님께서 주시는 평안만큼 좋은 것은 없는 줄 믿습니다.
갑작스럽게 목사님의 부탁으로 강단을 책임 맡고 보니 마음이 말할 수 없이 무거웠습니다. 그래도 기도하니 부담이 가벼워짐을 느꼈습니다. 제가 오늘 처음으로 주일 강단에 서게 됩니다. 물론 수요기도회나 새벽기도회를 통해서 말씀을 전했지만 주일예배의 말씀을 전하기는 오늘이 처음입니다.
너무나도 부족하고 허물이 많지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이 시간을 피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감히 제가 여러분 앞에 섰으니 이해해 주시고 사람의 말로 듣지 마시고 하나님의 음성으로 듣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주일 말씀을 준비하기 위해 지난 월요일부터 기도했습니다. 마음에 감동되기를 시편 23편이 마음에 공명되었습니다. 시편 23편이라 하면 누구나 즐겁게 낭송하고 외우는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말씀 중 하나입니다. 저도 신앙을 처음 가졌을 때 시편 23편을 늘 외우고 기도할 때 마다 23편을 마음으로 묵상하면서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때의 감동을 여러분에게 다 드릴 수는 없겠지요. 여러분은 어떤지 모르지만 전 정말 주님과의 만남이 얼마나 감동적이었는지 세상을 다시는 돌아보지 않게 되어버렸습니다. 정말 미련하나 없을 만큼 내 마음이 오로지 주님께 붙들려 버렸지요. 지금도 그 마음은 변함없습니다.
다같이 1절부터 교독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시는 다윗이 지은 수많은 시 중의 하나로 시중의 시, 그야말로 시의 백미라고 할 수 있을 만큼 깊은 위로를 주고 있습니다. 누구로 인하여 감사합니까? 여호와로 인하여 감사합니다. 여호와를 어떻게 부릅니까? 나의 목자라고 부릅니다. 다윗이 시편의 많은 부분을 썼지만 이처럼 만족스럽도록 주님을 찬양하며 완벽한 영혼의 충만함을 노래한 시는 별로 없습니다.
이 시의 배경을 보면 다윗이 목동으로 일하던 시절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를 다윗이 목동으로 일하던 시절에 썼는지 아니면 왕이 되어 늙은 시절에 옛날을 회상하며 썼는지는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오늘 말씀 속에서 다윗은 시의 첫 머리부터 하나님께 부족함이 없이 감사와 경배를 드리며 인도하시는 그분에 대한 한없는 경외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부족함이 없이 도우시는 그분께 감사하고 있음은 그가 말년에 누리는 행복 속에서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이 시를 쓰지 않았을까 추측도 해 봅니다.
2절의 푸른 초장은 무엇일까요? 양떼들이 푸른초장에 다니며 꼴을 먹는 풍경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장면 중 하나입니다. 여러분들이 날마다 주님 안에서 말씀과 더불어 말씀을 먹고 산다면 그 광경은 주님 보시기에 가장 아름다운 장면 중 하나 일 것입니다.
말씀은 우리 영혼의 양식인 꼴이 되는 것입니다. 목자되신 주님께서 우리를 말씀으로 먹이시고 영혼의 안식처인 교회로 인도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영혼의 쉼을 얻도록 인도하십니다. 우리를 푸른초장으로 인도하시고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 영혼을 소생시키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깊은 뜻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3절에서 말씀하시는 ‘내 영혼의 소생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는 곧 하나님 형상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창 1:27에 보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실 때에 자기의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가끔 하나님이 인간의 모습처럼 생기지 않았을까 하는 착각을 합니다. 자기의 형상대로 만들었다고 하니까 말이죠. 그러나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어떤 물질이나 모양을 가지신 분이 아닌 보이지 않는 영으로 존재하고 계십니다. 이 형상은 바로 ‘거룩’인 것입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속성 중 하나입니다. 거룩 외에도 하나님의 속성은 많습니다. 무한, 영원, 불변하심, 지혜와 능력, 의로우시고, 선하시고, 진실하시고
사랑, 화평, 인내, 자비, 긍휼.....
일일이 열거할 필요도 없이 그분은 영으로 존재하시지만 가장 완전한 성품을 지닌 분이십니다. 여기에서 그 속성 중 거룩을 강조하고자 함은 거룩이 오늘 말씀과 가장 일치한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레위기 11:45에서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한 것처럼 우리를 애굽에서 즉 세상에서 구원해 낸 것은 나를 닮아 거룩하라는 그 하나님의 간절한 소망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면 하나님의 성품이 여러분 안에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를 지으시고 그들이 에덴동산에서 한없는 평안과 행복을 누리기를 소망하여 그들을 하나님 형상대로 즉 그 성품대로 지었지만 그들은 사단의 꾀임에 빠져서 하나님께서 명하셨던 계명을 어겼고 선악과를 먹음으로 죄가 그들 속에 들어 갔지요. 즉 타락한 것이지요. 그 원죄는 인류를 죄인으로 태어나게 한 동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것이죠. 곧 거룩성을 잃어버린 거죠. 거룩함에는 전혀 티끌도 없는 깨끗함의 의미가 포함되었습니다.
인류가 죄를 범한 후에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죄의 담이 가로 막혀 버렸습니다. 즉 단절이 와 버린 것이죠. 소통이 막혀 버렸던 것입니다. 교제가 끊어져 버렸지요. 죄를 용납지 못하시는 하나님의 성품과는 교제가 일어날 수 없는 관계가 되어 버렸던 것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죄로 인해 멸망당하는 인간을 불쌍히 여겨 우리를 죄로부터 구해내려고 참으로 위대한 구상을 하시는데 이 땅에 메시야를 보내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분이 누구시죠? 네,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미국의 선교사가 인도에 가서 힌두교를 믿던 어떤 농부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농부는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낸 뜻을 도저히 깨달을 수 없었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농부가 밭에서 쟁기질을 하다가 큰 개미집을 허물어 버렸어요. 쟁기질하다가 개미집을 허물어서 개미들이 난리가 난 것입니다.
원래 힌두교는 동물이나 곤충을 신성하게 여겨서 결코 죽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농부는 개미들에게 빨리 도망가라고 소리를 쳐도 알아듣지 못하고 우왕좌왕 하더랍니다. 그렇다고 땅에 글씨를 쓴다고 그들이 알아듣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개미들이 어떻게 해야 농부의 말을 알아 들을까를 고심했습니다. 생각하다 그런 생각이 마음을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자신이 개미가 되어 그들 속으로 들어간다면 그들이 알게 될 것이다 라는 생각이 났던 것이죠. 이 깨달음으로 즉시 기독교 복음에 대한 깨달음이 왔다는 것입니다.
뭐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아무리 율법을 주어도 깨닫지 못하니까 스스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이죠.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빌려 성령으로 잉태되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모습 말입니다. 우리가 죄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어서, 우리 인간의 모습으로 오셔야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기 때문에 직접 오신 것이죠.
이 땅에 오셔서 천국비밀을 알려 주셨습니다. 우리가 그분을 믿으면 죄사함을 얻고 우리는 하나님 형상을 회복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형상을 회복하면 천국백성이 된다고 복음을 전파하시고 12제자를 만드시고 하늘로 다시 올라 가신 것이죠.
그리고 사도행전 2장에 보이는 성령을 보내 주신 것이죠. 그러니까 지금 시대는 각 개인에게 성령을 부어 주셔서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해 주시는 것이죠. 요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지금까지의 말씀이 이해 되십니까?
하나님의 형상 회복은 예수님을 영접한 우리 모두의 소망이고 꿈입니다. 왜냐구요? 그것은 곧 하나님 아버지의 뜻입니다. 그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 우리로 하여금 의의 길로 가도록 하신 것입니다. 의의 길이란 거룩한 그분의 성품을 닮아 그분처럼 살아가기를 원한다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지금 그리스도인들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형상 회복에 실패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일까요? 우리의 목적과 초점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세상은 얼마나 살기 좋습니까? 최첨단 디지털 시대로 과거에 어느 누구도 누려보지 못한 물질과 풍요로운 환경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 조선시대 어느 임금이 우리들이 타고 다니는 멋진 차를 타 봤을까요? 왕들이 먹던 음식이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로 차렸다 해도 과연 우리가 먹는 웰빙식탁과 견줄 수 있을까요? 그 왕들이 입던 비단 옷,(쉼) 지금 누가 쳐다보지도 않습니다. 당시의 왕들이 지금과 같은 좋은 변기를 사용했을까요? 여러분은 지금 최상의 조건과 환경속에서 누리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여러분은 진정한 만족을 합니까? 사람들은 만족할 줄 모릅니다. 모두가 불만에 가득 차 있습니다. 무엇엔가 굶주린 듯이 자꾸 새것과 자신의 욕심을 쫓아 더 좋은 것을 추구하며 달려가고 있습니다. 무엇이 이처럼 우리를 만족하지 못하도록 할까요?
이처럼 살기 좋은 세상인데 결혼한 사람 중 이혼율이 48%이고, 성적 타락은 극에 달해 있습니다. 커가는 아이들은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아이들이 별로 없습니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게임하기 위해 태어난 아이들과 같습니다. 얼마 전 연대 교수가 서울의 신촌지역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내용이 있는데, 대학생 중 4%만이 주일날 교회를 나가고 있고, 85%가 혼전성관계를 허용할 수 있고, 75%가 동성연애를 찬성한다는군요. 고등학생 중에는 3%만이 교회를 다닌다고 합니다. 무엇이 이와 같은 상황을 만들어 갑니까? 바로 인간의 죄 때문이죠.(쉼) 영혼은 말할 수 없이 황폐해지고 모든 것이 극단적입니다. 모 아니면 도입니다. 여러분 자녀들을 위해서 기도 많이 하시기 바랍니다. 이 모든 환경에서 영적으로 살아남아야 합니다. 이 모든 악조건을 이길 힘은 기도밖에 없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지금 시대는 마지막 시대라고 합니다. 노아가 방주를 지으며 사람들에게 외쳤을 때 모든 사람들이 귀를 닫고 죄의 향락에서 빠져 나올 줄 모르던 그 시절과 같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시에 물로 심판을 하였지만, 이제는 불로 심판할 것이라는 것을 계시록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다니엘서 12:4에 보면 다니엘의 예언 중 마지막 시대가 되면 어떨 것인가에 대한 예언이 나옵니다. ‘다니엘아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라고 했습니다.
지금 시대는 이처럼 사람들이 빨리 왕래하고 지식이 넘쳐나는 시대입니다. 알고자 하는 것은 모두 인터넷 지식검색을 하면 다 나옵니다. (뵈뵈집사)
여러분, 지금 시대는 전도도 막혀 있습니다. 왜인지 아십니까?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어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 형상을 회복하지 못하여 살기 때문에 영적인 영향력을 전혀 끼칠 수가 없는 것이죠. 하나님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을 가야하는데 그리스도인의 초점이 하나님과 다른 방향으로 가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가 없는 것이죠. 전도를 다니다 보면 사람들은 말합니다. ‘믿는 것들이 더 나쁘더라’ 끝없이 듣습니다. 그래서 말합니다. ‘우리 믿음의 대상은 예수님이지 사람이 아니지 않습니까?’ ‘당신이 사람 때문에 예수 못 만나 천국가지 못하면 누구 손해입니까?’ ‘그래도 우리는 믿는 사람 보지 누구를 봐요? ’(쉼)
그렇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보는 것이 아니라 믿는 우리를 보고 알고 있는 것입니다. 마 5:16에 보면 ‘이와 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어 그의 빛 안에 들어온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빛과 소금입니다. 여러분 스스로에게 물어 보세요. ‘과연 나는 빛 된 삶을 살았는가?’ (눈감고)각자 양심으로 응답받으셨을 줄로 믿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고후 6:14-16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셨느니라’ 이 말씀을 들으면 여러분은 당장 마음속에서 그럴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상과 담쌓고 살란 말입니까?’ 그럴 수는 없는 것이지요. 이 말씀은 세상 사람들로 인하여 신앙생활에 손상을 입을 것을 우려한 말씀이지 일체 관계를 단절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영적생활입니다. 영적생활은 분명하게 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세상 가운데에서 사는 여러분이 하나님 말씀을 믿고 경외하신다면 그 말씀들에 분명한 순종함이 뒤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에 순종하려면 걸리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선택을 하면 그 뒤는 주님이 책임져 주십니다.
여러분들이 영적인 깊이를 알면 알수록 이를 민감하게 느낄 것입니다. 이 말씀을 주신 뜻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이 말씀이 성경에 기록한 것은 여러분을 실패하게 하려고 주신 것이 아니라, 거룩케 하고자하는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고전 5:9-10에 보면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 하였거니와 이 말은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과 토색하는 자들이나 우상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하려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 이들과 사귀되 그들처럼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러한 세상 사람들과 놀다보면 어떻습니까? 그 장소와 그 모든 시간들이 즐겁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아직도 거룩에 이르지 못한 것입니다.
여러분 안에 성령께서 역사하신다면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는 여러분을 그 장소에 그냥 있도록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음행과 탐욕과 토색하는 것을 좋아하는 세상방법을 버리지 않는 한 하나님의 거룩에 도달할 방법이 없습니다. 지금까지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이와 같지 못하였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을 바르게 보지 못한 것입니다. 그들과 함께 있으면 빛과 어둠이 드러나야 하는데 어둠 가운데에서 빛이 어둠에 묻혀 버린다면 어디 주님께서 말씀하신 빛 된 삶을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제 간증을 잠깐 하겠습니다. 얼마 전에 인천에 사는 친구가 전화가 와서 우리는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역사하심에 놀라운 간증을 서로 나누었습니다. 시골에 어린이집 원장인 친구가 있는데 제가 안좌에 있을 때 참 친했습니다. 그 친구가 인천에 사는 친구에게 전화가 와서 얼마전부터 교회에 나간다는 것입니다. 그 친구가 예수님 앞으로 나온 것입니다. 그 친구가 예수 믿은 것은 기적이라고 우리는 말합니다.
정확히 7년이 지났군요. 그 친구가 그랬대요. 그때 내가 예수에 미쳐서 하던 말이 이제 이해가 된다고 했대요. 한마디로 압축하면 ‘세상 보다 예수가 좋다’ 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에 그 친구는 그 말이 이해가 안 되었대요. 그런데 자기가 교회에 나가고 보니 내가 한 말이 이해가 되더라고 이야기 하더랍니다. 교회에 나가면 눈물이 나고 찬송을 부르면 눈물이 나고 말씀을 들으면 눈물이 난대요.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빛이 그 빛을 잃지 않으면 언젠가는 어둠을 밝혀준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래서 확신을 얻었습니다. 빛은 빛으로 살아야 그 빛이 영광의 광채가 되어서 그들을 인도한다는 사실을요. 고후 4:3-4에 보면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라’ 그렇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이 땅에서 사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에 순종하면 하나님의 형상을 이룹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면 이 세상 신으로 인해 혼미해진 그들 영혼에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그들을 구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면 복음은 능력이 있었진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지금 기독교는 위기입니다. 일명 ‘개독교’로 부릅니다. 이것이 누구 탓이겠습니까? 예수님 탓이라고 말해야 할까요? 그리스도인이 거룩한 삶을 살지 못한 결과가 지금 그대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카멜레온이 아닙니다. 세상에 있으면 세상사람처럼 되고 교회에 오면 교인 같아 보이는 삶을 계속한다면 결코 여러분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일하실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말씀 앞에서 죽음이 와도 순종하고 모든 것을 잃어 버려도 주님을 놓치 않는 자를 찾으십니다. 빌 2:6-8에 보면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주님은 이처럼 하나님께 죽기까지 순종을 보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순종하는 자가 있다면 어찌 그분의 눈에 띄지 않겠습니까? 그런 사람이 주님의 눈에 띄면 주님은 그 한 사람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펼쳐 가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만나서 진정으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변화되었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의 영혼을 통해 끊임없이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해라, 이렇게 행동해라.....그렇게 해서 그 사람의 마음에 소원이 생기게 하십니다. 빌 2:13에 ‘너희 안에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즉 여러분 마음에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그 소원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했어요.
우리 영혼을 구원하신 목적도, 영혼을 소생시키신 목적도, 우리가 하나님 형상을 회복하여 하나님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 곧 거룩한 길을 가라는 하나님의 부탁이신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 한사람 한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 의의 길로 걸어갈 때 사회는 정화되고 우리는 세상 사람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4절 이하에 나오는 말씀은 믿음생활 하면서 어떤 난관을 만났을지라도 두려워할 것이 없음을 말씀하십니다. 주님과 여러분이 동행하는 삶을 살게 되면 골짜기에 갇혀 있는 인생이 아니라 골짜기를 지나갈 찌라도 염려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거룩의 삶을 사는데 어둠이 어찌 나를 넘어뜨리겠습니까?
다윗은 사무엘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후 참으로 험한 세월을 살았습니다. 사울왕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면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게 되고 악신에 시달리자 그를 위해 찬양을 불러주며 악신을 쫓아내 주고,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고 있을 때 전쟁터에 찾아간 다윗이 돌멩이 하나로 블레셋의 골리앗을 물리치는 등 사울을 위해 충성을 다했지만 악신에 시달리는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고 갖은 방법을 다 동원합니다. 은혜를 원수로 갚으려 한거지요.
그러나 다윗은 사울을 대적하거나 그를 미워하지 않습니다. 일곱 번이나 다윗을 죽이려고 쫓아다녔지만 그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보호해 주셨습니다.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왔으나 하나님께서 한 때 기름부었던 왕을 죽일 수 없다고 죽이지 않는 겸손함이 있었습니다. 하나님 뜻대로 사는 사람에게는 이와 같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찌라도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지키시므로 염려할 것 없다는 것입니다.
인도 봄베이에서 선교사로 일하던 허비 부인이 죽어 가고 있을 때, 그녀의 친구가 "당신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는 동안 구세주께서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라고 위로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서 그녀는 "어둡다고요? 어두움이 하나도 없는데요. 모두가 빛이에요"라고 했습니다.
그녀는 병들어 있는 동안 하나님의 온전하심을 보고서 이렇게 말했습니다:"그분은 참으로 거룩하신 분입니다. 그분의 다른 속성보다도 이 거룩함이 가장 소중하게 보입니다." 그녀는 또한 그리스도의 영광과 위엄을 보고서 그 광경을 표현했다:"그분에게 속한 다른 모든 영광이 사라지고 그분만이 홀로 남는다면, 그래도 그 영광이 우주에 충만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힘든 상태에 놓여있을지라도 그분의 빛이 우리 안에 있다면 이처럼 그 거룩한 영광으로 인하여 우리 영혼이 안식을 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5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원수인 사단 앞에서 우리에게 따뜻한 식탁을 차려 주시는 분이십니다. 성령의 기름부음을 늘 부어 주시니 우리의 잔이 흘러 넘친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잔은 기업을 비유한 말입니다. 다윗은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최대의 기업을 소유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의 식탁은 어마어마한 축복이었습니다. 실제로 그가 차지한 왕실의 재산과 사유 재산은 실로 엄청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대상 27:25-31; 29:2-5).
그러나 그는 이토록 풍성한 기업을 자기의 쾌락을 위해 사용하지 아니했고 하나님의 전을 건축하는 데 아낌없이 바쳤습니다. 즉 이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자신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그가 평생 소원이 하나님 전을 건축하는 것이었는데 그가 전쟁에서 피를 많이 흘렸으므로 성전은 그 아들 솔로몬 대에 와서 짓도록 허락하셨습니다. 하지만 성전 지을 모든 물질과 비용은 이미 그가 하나님께 헌신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뜻대로 사는 자에게는 우리가 구하지 않은 모든 부분을 그분의 능력 안에서 채워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6절을 보면 하나님의 그 선하심과 인자하심으로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는 것으로 그의 시가 끝을 맺고 있습니다.
다윗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여러 번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를 체험하고서 이렇게 결심을 하게 됩니다. 그는 이런 결심을 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헤아려 봅니다. 하나님은 푸른 초장에서 다윗에게 말씀을 먹이시고 쉼을 주셨습니다. 여호와는 다윗의 영혼을 소생시키셨고 그를 의의 길로 인도하시고, 그를 하나님 형상을 회복하여 살도록 하셨습니다.
그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았기에 그를 새롭게 하셨습니다. 또한 위험한 지경에 처해서는 힘을 주셨고, 죽음의 위험을 당해서도 그를 지키셨습니다. 그에게 수많은 원수들이 있었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그에게 많은 축복을 내려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이 많은 자비로움을 체험했기에, 그는 하나님 곁에 영원히 거하는 것이 진정한 행복자임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주님을 만나서 주님의 살아계신 말씀을 만났습니다. 말씀으로 영혼이 소생함을 얻어 주님께서 원하시는 거룩의 길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 곧 의의 길을 간다면 우리가 어떠한 환난과 고난을 만날찌라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게 될 것입니다. 결코 조급해 하진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사단 앞에서 여러분에게 축복을 허락하시고 다윗의 잔이 넘친 것처럼 여러분의 잔도 흘러 넘치는 은혜를 덧입혀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상천국인 교회로 여러분을 초청하셔서 이곳에 거하도록 하셨습니다. 부디 이 한 평생 다하도록 충성되이 교회를 섬기다가 믿음의 결국인 영원히 거하는 천국의 안식에 이르기까지 그 믿음 변치마시고 거룩한 길 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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