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열매를 맺는 신앙
거룩한 열매를 맺는 신앙 롬 6:15-23
주일을 지키시고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함으로 예배의 자리에 나오신 모두를 축복합니다. 우리 모두 옆 사람을 위해 축복해 주십시다. 축복합니다. 사랑해요.
지난 주에 제가 설교한 성경 본문을 알고 계시는 분 손들어 보세요. 또 설교의 주제가 무엇인지 한 마디로 설명하실 수 있는 분 있으신가요?
네!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자는 것이었지요. 목사님의 심정을 이해할 것 같습니다. 목사님께서 여러분께 가끔 물어 보시잖아요. 이렇게 쉽게 잊어 버리고 사는 여러분에게 같은 설교를 일년 후에 한다 해도 전혀 새로운 설교로 들릴 수 있다는 안도감이 드는군요.
(기억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
우리는 아담과 하와의 원죄 이후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 버렸고 그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고 우리 영혼은 죽어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 죄가 고백되어지고 십자가의 공로로 용서함을 받은 후 우리 영혼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회복이란 분명하게 눈에 보입니다. 대충 어리버리 신앙생활하는 것이 아닌 진정 예수 그리스도의 지배를 확실하게 받고 있다는 증거들이 보이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본문을 교독하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거듭남의 체험을 하셨습니까? 어떤 분은 거듭남을 분명하게 체험하신 분도 있고 어떤 분은 아직도 그것이 뭔데요? 할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도 신앙생활 어느 정도 하면 거듭남이 무엇인지는 지식적으로는 알게 되지요.
요 3장에서 유대인 니고데모가 예수님께 찾아왔을 때 예수님께서 거듭나지 않고는 결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하니까 니고데모의 대답이 걸작이었지요. 모태에 다시 들어갔다 나오는 것입니까? 그렇게 어리석은 질문을 했던 것을 여러분은 아실 것입니다. 거듭남이 분명히 무엇인지 영적인 체험을 하신 분은 아실 것입니다.
내 영이 죽어있던 순간과 내 영이 성령으로 인하여 깨어난 시점과는 분명하게 다르다는 사실을요. 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이 말씀이 새롭게 인정되신 분은 분명하게 거듭났음을 스스로 아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 중 많은 이들이 거듭남의 체험을 하고도 옛 생활로 되돌아가 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성령체험 후 방언도 하고 은혜도 체험하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똑똑하게 경험하였는데 왜 옛 죄의 습성을 쫓아가 버릴까요.
이는 거룩한 실천이 얼마나 우리에게 힘든 과정인지를 알게 해주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고 죄인된 우리가 의롭다 여김도 받았습니다. 갈 2:20에서처럼 그리스도와 함께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산 것이라 고백도 합니다.
그런데 어느 때인가부터 서서히 영적으로 매말라가고 옛 죄의 습성들이 나를 유혹합니다. 여기에서 인내로 극복하지 못한 사람은 믿음을 떠나버리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여러분과 거듭난 이후의 영적관리를 잘하기 위해 거룩한 실천과 열매 맺는 삶을 살기 위한 방법 등을 나눠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영접하면 세례를 받습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말미암아 죄에 대하여 죽었습니다. 주 안에서 주님에 의해서 죄가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는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무려 6시간 동안이나 매달려서 인간이 당할 수 있는 모든 고통을 당하면서 서서히 죽어 가신 것을 아실 것입니다.
그 모습은 내가 죄로 살았을 경우의 실제적인 내 죄의 결과입니다. ‘죄인의 모습은 이런 것이다’ ‘죄를 지으면 우리의 끝이 이렇게 되는 것이다’ 그것을 분명하게 만천하에 눈으로 보여 주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23절에 보시는 죄의 삯인 사망의 모습입니다. 육신의 죽음 뿐 아니라 영혼까지 그렇게 죽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므로 스스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우리를 영원한 죽음에서 살리기 위하여 그처럼 죽으셨던 주님이십니다. 우리가 만일 예수를 만나지 못하고 죄인으로 살다가 죽게 되면 우리의 결말이 그와 같은 고통이 있다는 것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지옥의 고통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상상이 가시지요. 십자가의 고통의 순간들이요.
저에게는 몇 년 전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큰 조카의 죽음앞에 몹시 힘든 시간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사랑하셔서 세례받은 지 6개월만에 데려가시는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만일 그 당시 저희 오빠가 믿음이 없었다면 아들의 죽음을 인정하지 못하고 가정이 난리가 났을 것인데 하나님 은혜를 깨달았기에 우리 모두는 그 아들이 천국가는 것으로 감사했습니다.
그 후 저는 광주해방산 기도원에 가서 금식하며 5일을 기도하다 왔습니다. 거기에서 이사야 53장을 묵상하면서 주님을 깊이 체험하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얼마나 많이 울었습니다. 주님의 그 사랑에 울었습니다.
주님의 인간 사랑과 우리를 구하시려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양처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같이 순종하고 십자가를 받아들인 그 사랑에 탄성을 지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위해 사신 분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죽기까지 순종만 하였던 분이셨던 것입니다.
십자가가 우리에게 왜 의미가 있습니까? 우리 죄를 대신해 죽으신 것만으로는 완전한 사랑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가 죽은 지 삼일 만에 무덤에서 다시 살아났기 때문입니다. 만일 부활이 없었다면 그의 십자가의 죽음이 아무런 의미가 없었을 것입니다. 고전 15:17을 같이 보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보십시오.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요.
그래서 우리가 그를 믿는 자마다 부활이요, 생명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심으로 우리가 죽어야 할 죄의 짐을 대신 져주셨는데 만일 그 은혜를 망각하고 또다시 죄인의 길로 돌아간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철저한 배신이 될 것입니다. 저나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철저하게 깨닫고 알게 되었다면 우리 전 생애를 통해서 하나님을 배신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오늘의 본론인 거룩한 삶의 실천으로 말씀을 옮겨갑니다. 하나님은 거룩 그 자체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변화되어 거룩한 길을 가는 것을 신학 용어로 ‘성화’라고 합니다. 거룩할 성자에다 될 화가 결합되어 성화라고 하는 것입니다. 거룩한 성품으로 변화되어 간다는 것입니다.
성화란 그리스도인이 실생활에서 점점 더 죄에서 멀어지고 그리스도를 닮아 가도록 하나님과 사람이 더불어 일하는 점진적인 과정입니다. 성화는 거듭남의 순간부터 시작되며 이는 평생토록 계속되며 천국에 이를 때 성화는 이루어집니다.
성화의 과정에서 우리는 필수적으로 성령과 말씀과 기도로 사는 것입니다. 롬 8:13-14을 읽겠습니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즉 성령의 인도함을 받을 때 몸의 행실을 죽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몸은 죄악의 웅덩이와 같습니다. 날마다 새 물이 공급되지 않으면 죄로 인해 썩어버릴 웅덩이와 같은 것입니다. 우리 안의 죄가 청소되지 않으면 어느새 죄는 고개를 들고 우리를 죄로 이끌어 가는 것을 느낍니다. 육신으로 하여금 죄짓도록 유인하는 이 끝없는 도전은 어디에서 시작될까요?
여러분의 마음 밭 곧 생각 속에서 시작이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생각을 어떻게 관리하고 계시는지요? 우리는 모두 생각을 관리하는 파수군입니다. 내가 지키지 않으면 누가 지킬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전쟁터와 같습니다. 온갖 생각들이 혼잡하게 우리의 생각 속으로 침임해 들어옵니다.
텔레비전을 봅니다. 인터넷을 합니다. 사람을 만납니다. 누구와 싸웁니다. 사업장과 직장 등, 생활 속에서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과의 교제를 통해 외부에서 여러분의 생각 속으로 죄의 유혹들이 손을 뻗칩니다.
남을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죽이고 싶은 마음, 온갖 타락과 달콤한 죄의 유혹,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 온갖 탐심과 안목의 정욕, 교만 등 수도 없이 사단의 적진에서 불화살이 날라 오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 모든 죄악의 씨앗들은 내 생각 속에서 내 양심과 내 믿음과 전쟁을 합니다. 여러분은 그 많은 생각 중 어느 것은 버리고 어느 하나를 선택하고 어느 생각을 붙잡게 됩니다.
옳지 못한 것을 물리쳐 버릴 수 있지만, 우리는 옳지 못한 것을 붙들 수도 있습니다. 그 생각 중 하나가 내 죄의 본성과 만나면 죄를 짓는 길로 가는 것이고 나의 선한 양심이나 믿음과 만나면 거룩한 삶의 실천으로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엡 4:22-24을 보면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
위 말씀과 견주어 본다면 그러니까 내 생각은 죄의 통로가 될 수도 있고 거룩한 삶의 실천을 이룰 수 있는 통로가 될 수도 있는 것이죠. 여러분의 생각 속에서 정확한 분별이 이루어진다면 반쯤은 성공하게 됩니다. 분별의 지혜를 달라고 많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아, 이것은 죄이다. 아, 이것은 주님께서 기뻐하실 일이다. 죄는 무엇으로 물리칠 수 있겠어요? 기도와 말씀이죠. 또 우리의 연약함을 돕기 위해 성령께서 합력하여 주십니다. 우리의 영적생활을 위해 돕는 성령께서 친히 인도하여 주십니다.
롬 8:26을 봅시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성령안에서 방언기도를 해 보십시오. 우리는 죄를 이길 힘을 얻게 됩니다. 기도와 말씀의 양 날개를 갖고 계신 분들이라면 능히 죄를 이길 힘을 갖춘 것입니다.
루터가 말했습니다. ‘새가 우리 머리 위를 날아다닐 수는 있어도 머리에 둥지를 틀게 해서는 안된다’라고요. 그러니까 우리의 생각 속에서는 무수한 죄악들이 우리 마음 밭을 떠다니며 괴롭히지만 우리 안에 둥지를 틀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받아들이기 시작하면 마귀는 자신들의 견고한 진을 구축하기 위해 여러 귀신들을 부르고 우리를 죄의 사슬로 매어 버립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고 말씀을 떠나게 하고 기도하지 못하도록 환경을 결박해 버립니다.
여러분이 조금만 영적생활에 관심을 가진다면 우리는 금방 이와 같은 마귀의 궤계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기도할 시간도 없다. 말씀을 배울 시간도 없다. 예배 드려야 하는데 무슨 일이 있어서 못 나간다. 등등 우리의 영적생활을 끝없이 훼방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러분이 주님 방법대로 살겠노라고 결심하고 그 의지를 주님께 드리기 시작하면 여러분은 위와 같은 여러 습관적인 핑계 보다 주님 만나는 일이 중요하다고 여겨지기 시작합니다.
그 선한 의지는 주님께서 받으시고 역사해 주십니다. 주님께 내 시간과 몸과 물질을 드리면서 간절한 마음으로 예배의 자리에 나오기를 힘쓰는 그 일이야말로 승리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싸움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단지 선택을 하고 내 믿음을 주님께 드릴 뿐입니다. 싸움은 이미 주님께서 승리해 놓으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이미 이겨놓은 싸움을 내가 택하여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얼마나 감사합니까?
어떤 이들은 주일 예배 나오는 것이 의무일 수 있고, 어떤 이들은 기대와 감격을 가지고 예배의 자리에 나오기도 합니다. 어떤 모습을 지니고 이곳에 왔든지 주님은 여러분과 함께 하십니다. 내 모습 이 대로를 주님은 받으십니다. 단지 내 진심을 주께 드릴 때 말입니다.
일주일 동안 죄 가운데 살다가 주님 앞에 오셨다면 ‘이 죄인 받아주시옵소서’ 하는 상한 마음과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 드리면 됩니다. 죄를 감추려 하지 마십시오. 시편 51:17에서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그렇습니다. 주께서는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을 결코 멸시하지 않으시고 그 심령을 위로하여 주십니다.
주님은 회개하는 자를 가장 기뻐하십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갈 때에 죄를 가지고 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배를 통해 죄인된 우리의 모습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과하며 주님의 긍휼과 자비를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은혜받을 만한 자격이 있었습니까?
우리가 주님의 능력앞에 마음을 열고 회개한 다음 주님께 우리의 삶을 온전히 드리면 그분께서 우리의 전 존재를 껴안아 주십니다. 비록 죽는 날까지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여전히 죄와 싸우겠지만 그분으로 인하여 죄가 그 악한 죄가 우리 안에서 승리할 수 없다는 확신을 갖게 됩니다. 믿습니까?
롬 8:1-2를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할렐루야!!
어떤 이들은 일주일을 살면서 죄와 피터지게 싸우고 승리자의 모습으로 이 자리에 오신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주일을 예비하는 마음과 정성된 예물과 깨끗한 영혼으로 주님 앞에 와 서 보십시오.
그 예배가 얼마나 감격이 넘치는 예배가 되는 것인지.... 예배는 하나님의 생명이 공급되는 통로입니다. 예배를 통해서 여러분은 하나님의 생명을 공급받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하나님의 기름진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한 주간을 살아낼 새로운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주께 드리는 내 마음의 기도와 경배와 찬양, 영혼으로 만나는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위로해 주시는 은혜를 맛보고 계신다면 여러분의 예배는 성공된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마음을 안고 오셨든지 진실한 마음을 주님께 드릴 때 주님께서는 그에 합당한 은혜를 넘치도록 부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거룩한 성화의 길을 가는 동안 여러 가지 조건들이 우리를 괴롭히겠지만 어느 때 부터인가는 지난 날 죄에 매여 있었던 삶이 부끄럽게 여겨집니다. 그래서 그곳으로 다시는 가고 싶은 마음이 없어짐을 알게 됩니다. 거룩한 삶의 결과인 열매가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열매 맺는 삶을 살도록 하나님의 택함과 세움을 입었습니다.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같은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태도는 마땅히 우리 삶의 일부분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들이 내면화 될 때 그때부터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줄 수 있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겪는 흔한 문제점은, 세상의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하게 해 줄 이러한 적극적인 태도를 나타내지 않는 것이지요.
독일에 관련된 한 가지 이야기가 있습니다. 베를린이 분단되어 동독은 공산치하에. 서독은 자유진영이 되었을 때의 일입니다. 통일되기 전의 독일을 말합니다. 동베를린 사람들이 한 트럭의 쓰레기 더미를 서베를린 진영으로 가져와 쏟아 부었답니다. 서베를린 사람들은 쓰레기를 주워 모아 트럭에 실어 다시 동쪽으로 내버릴까 하고 생각했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식으로 일을 처리하지 않기로 결정했대요. 오히려 덤프 트럭 한 대에 통조림과 또 쉽게 부패하지 않을 식량을 채워 동독으로 가서 그것을 산뜻하게 쌓은 후 그 옆에 표시판을 하나 세웠답니다. ‘사람은 각자 자기 속에 있는 것을 준다’ 이것은 정말 멋진 가르침이 아닌가요? 여러분도 내면적으로 열매 맺는 삶을 살 때면 다른 사람들에게 이와 같이 좋은 열매를 나누어 줄 수 있습니다.
이와 반대되는 하나의 예화로 그 열매를 보고자 합니다.
불란서의 작가 알베르 까뮈의 희곡 [오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그 작품 속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중부 유럽의 외딴 들판에 한 모녀가 살고 있었습니다. 어머니와 딸, 그들은 조그만 여인숙을 경영하면서 가난하고 고독하게 살아갑니다.
원래 그 집에는 '쟌'이란 아들이 있었지만 어렸을 때 가출했습니다. 두 모녀는 가난과 고독에 지친 나머지 이상한 범죄를 저지르게 되었습니다. 자기 집 여인숙에 투숙하는 손님 중에서 특별히 돈 있어 보이고 혼자 투숙하는 남자 손님에게만 마취약을 먹인 후 목 졸라 죽이고 소지품을 뒤져서 돈과 보석을 빼낸 다음에는 강물에 빠뜨려 버립니다. 처음에는 호기심에서 그리고 그들의 고독과 가난을 충족시키기 위해서했지만, 이것이 상습화되었습니다.
어느 날 건장한 젊은이가 투숙했습니다. 돈 있어 보이고 성공한 남자처럼 보였습니다. 그 젊은이를 그 날 밤 마취약을 먹인 후 죽이고, 그의 주머니를 뒤지다가 떨어진 신분증과 사진을 보니, 바로 28년 전에 가출했던 '쟌'이었습니다. '쟌'인 것을 확인한 모녀는 부들부들 떨면서 실신해 버렸습니다. 그 고통을 감당할 길이 없어서, 모녀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작품에서 가르쳐 주는 것이 있습니다. 불행한 그들, 가난과 고독에 흐려졌던 그들. 남들이 행복하게 사는 것이 역겨웠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불행한 처지를 생각하면서 남들의 행복을 그냥 두지 않고, 남들의 행복을 빼앗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결국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마지막 행복마저 송두리째 빼앗기고 만 것입니다. 불의한 죄의 씨앗을 심는 곳에 불의한 열매가 열리고, 사랑을 심는 곳에 아름다운 사랑의 열매가 열립니다. 이것이 인륜의 법칙이며 하나님의 창조 질서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와 현재 살고 있는 분과 견준다면 누구의 말을 더 신뢰하겠습니까? 모두가 주님을 택하실 것 같은 눈초리 입니다. 그렇지만 실제 삶에서는 혹 남편이나 아내 말을 더 신뢰하지 않습니까? 혹 주님을 나와 멀리 떨어져 있는 상상속의 주님 정도로 두고 있지는 않습니까? 필요에 따라 내 소원을 이루어 주시는 분 정도로 여기지는 않는지요. 여러분 삶의 중심에 주님이 자리하고 계시다면 여러분의 신앙은 희망이 보입니다. 참으로 감사할 일입니다.
주님은 실제적이고 현재적이고 인격적인 분이십니다. 지금도 여기에 계시는 것입니다. 느껴 보십시오. 주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은 거짓이 없습니다. 하지만 여러분과 함께 사는 분들은 때로는 어떤 상황을 피하기 위해 거짓말도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누가 여러분들에게 실제적인 분이겠습니까?
주님 보다 자식이나 남편이나 아내가 더 좋은 분들에게는 죄송하지만, 여러분에게 강조하고 싶은 것은 여러분과 함께 하시는 분보다 주님을 사랑하는 쪽에 무게를 두시면 여러분은 틀림없이 영적생활에서 승리하실 것입니다.
그렇다고 주님 외의 것을 무시하거나 외면해 버리라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주님을 향한 나의 전인격적인 신뢰와 사랑을 드린다면 그분은 여러분의 삶 속에서 더 큰 사랑과 은혜를 여러분 가정에다 부어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이 없다, 여기는 사두개인과 서기관들과 대화중에 그들이 율법의 계명 중 첫째가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막12:30-31에서 그랬습니다. 다 같이 읽겠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가장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후에 네 이웃의 첫 번째인 부부, 또는 자녀 등등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생각과 마음, 주님을 향한 믿음 등을 새롭게 점검해 보십시오. 과연 나는 정말 주님을 사랑하고 있었는가....(쉼)내 남편이나 혹 내 아내나 내 자식이 더 귀하다고 여기지는 않았는지요. 여러분이 주님을 사랑하고 신뢰하면 주니은 암탉이 병아리를 품듯 여러분 가정을 품어주실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의 생각에서부터 주님을 무시하는 태도는 버리십시오. 내 생각에서 매번 주님방법을 선택할 때 마다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일하십니다.
여러분이 주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사랑을 고백하는, 믿음의 기도를 주님께 드리면 주님께서는 어느 땐가 여러분을 시험하실 때가 올 것입니다. 모두 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그 믿음이 진실인지 아닌지를 주님께서는 달아 보십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해 그의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명한 하나님의 명령이 여러분 삶을 통해서도 나타나실 수도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은 가장 소중한 자식이었습니다. 여러분에게 다가서는 하나님께서도 가장 소중한 것을 요구하실 것입니다. 물질을 요구하실 때도 있습니다. 너무 긴장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어떻게 반응하실 것입니까? 내 아들은 안돼요, 주님, 이것만은 안돼요, 라고 몸부림칠 것입니까? 아니면, 네 주님의 뜻이라면 제가 복종하겠습니다. 이렇게 나오시겠습니까? 주님께서 내게 이러한 무리한 요구를 하실 때에는 그 후의 축복도 예비하신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이심을 굳게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일방적으로 학대하거나 고통 주시려고 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축복을 예비하시는 하나님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을 시험하실 때 부디 여러분의 믿음도 아브라함 같은 믿음이 되어서 주님의 무한대의 축복을 받아 누리시기 바랍니다.
제가 월요일이면 부천에 서울신대에 있는 목회신학연구원에 가서 공부하고 옵니다. 저번 주에도 공부하고 오는 길에 차에서 같이 공부하는 전도사님과 많은 이야기를 하는 도중에 저는 저도 모르게 내 과거의 어느 한가지에 대한 거짓말을 했습니다. 너무도 순간적이었습니다. 거짓을 택하는 순간 마음이 두 방망이질 치기 시작했습니다. 집에 돌아와 회개기도 했습니다. 언젠가는 진실을 말해 줘야지. 난 아직도 죄로부터 자유하지 못하구나 자책하면서 몹시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주일 말씀을 준비하기 전 말씀 앞에서 도저히 양심의 가책 때문에 견딜 수가 없어서 그분에게 전화를 하였고 내 죄를 고백하였습니다. 눈물이 어찌나 나던지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나는 죄를 지을 수가 없다,
양심의 가책 때문에 견딜 수가 없어 전화했노라고 고백했을 때 그 전도사님은 오히려 저를 위로해 주었습니다. 저를 위대하다고 하더군요. 저는 그런 칭찬 받기 위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죄는 한번 짓기 시작하면 습관이 됩니다.
이와 같은 죄가 반복되면 내 믿음과 양심에 오점을 남깁니다. 성령께서 나를 떠나신다면 그것이 내게 가장 최대의 괴로움이기 때문에 그것이 두려웠던 것입니다. 다윗이 밧세바 때문에 죄를 짓고 하나님께 회개한 후에 그 인생의 모든 것이 다 떠나도 성신만은 거두지 마시라고 고백했던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죄를 가볍게 보지 않으시는 주님을 결코 실망시킬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전화를 끊고 한동안 눈물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주님께서 내게 위로를 주셨습니다. 죄는 한번 내가 용납하면 그 다음부터는 쉽게 지을 수 밖에 없도록 되어 있습니다. 내가 부끄럽고 창피하더라도 고백했을 때 다시는 그와 같은 죄를 짓지 않게 됩니다.
죄를 단호하게 물리치려는 나의 선택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됩니다. 저는 이 고백을 하는 것이 여러분 앞에서 창피한 일이지만 여러분은 은혜로 받아 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저의 연약함을 여러분과 나눔으로 우리가 얼마나 죄 앞에서 단호해야 하는지를 알리고 싶은 것입니다.
거룩한 실천의 삶을 사노라면 이처럼 참으로 견디기 힘든 순간도 있을 것입니다. 죄와 싸워야하는 고통도 있습니다. 육신의 유혹을 참아내야 하는 아픔도 있습니다. 두 가지 선택에서 말할 수 없는 갈등과 싸울 수도 있습니다.
바둑에서 돌을 두는 것을 포석이라고 합니다. 내가 흑돌을 놓을 것인가 백돌을 놓을 것인가? 그러나 우리는 순간 순간 위대한 결단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거룩한 열매를 얻어 영생에 들어가야 할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이잖습니까?
하나님 나라에 이르기까지 이와 같은 싸움은 계속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함께하시는 저와 여러분 마음에서 그분에게 나의 믿음과 삶을 드릴 때 탁월한 선택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2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