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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호.열매없는 한국교회... (성령의 열매를 100%맺을 수 있는 비법) 9. 세상 방법과 다른 접붙임 “또한 가지 얼마가 꺾여졌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 되었은즉”(롬11:17)
돌감람나무와 참감람나무가 모두 열매를 맺었다. 그런데 참감람나무는 찌그러진 열매를, 돌감람나무는 탐스러운 열매를 맺었다. 이 두 나무 중에 어떤 것이 좋은 열매를 맺었는가? 생생하게 맺은 돌감람나무인가? 찌그러지게 맺은 참감람나무인가? 아무리 열매가 찌그러졌어도 좋은 열매는 참감람나무의 열매이다.인간과 예수는 두 나무와 같은데 우리는 돌감람나무요, 예수는 참감람나무이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를 떠나서 참감람나무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가? 전혀 불가능하다. 외적으로 아무리 깨끗하다 하여도 참감람나무의 열매는 열릴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접붙이는 비유를 통해 우리가 예수에게 접붙이기를 원하고 있다.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예수님에게 접붙여져야 과실을 많이 맺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접붙이는 과정에서 깨달아야 할 문제가 있는데 그것은 좋은 열매를 구하기 위하여 가지가 좋아야 하느냐 나무가 좋아야 하느냐 하는 문제이다. 제주에 가면 감귤이 많다. 그런데 그 좋은 감귤의 뿌리는 모두 탱자나무이다. 어떻게 탱자나무 뿌리에서 좋은 감귤이 열릴 수 있는가? 그것은 탱자 뿌리에 좋은 나무 종자의 가지를 접붙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경에는 정반대의 말을 하고 있다. 가지가 좋아야 좋은 열매를 맺는데 가지가 좋은 것이 아니라 뿌리가 좋은 것이다.
“돌감람나무인 네가 참감람나무에 접붙임이 되었다”(롬11:17) 우리는 돌감람나무이다. 그리고 우리는 가지이다. 좋은 열매는 가지가 좋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가지이면서 돌감람나무이므로 못된 나무이다. 그런데 어떻게 좋은 열매가 맺어질 수 있는가? 나는 로마서에 있는 이 성경을 보고 이상하다고 느낀 때가 있다. 왜냐하면 성경에 나오는 접붙임의 방법과 세상에서의 접붙임의 방법은 정반대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성경에 있는 방법으로 접붙이면 절대로 좋은 열매가 맺어질 수 없다. 좋은 밀감 나무 뿌리에 탱자나무의 가지를 붙이면 밀감이 열리는 것이 아니라 탱자가 열린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참감람나무요, 우리가 가지인데 예수님의 뿌리에 우리가 가지로 접붙여진다면 열매는 과거에 열리던 열매가 그대로 열릴 수밖에 없다. 감나무도 접붙일 때 고염(일명나도감)나무 뿌리에다 좋은 감나무의 순을 접붙인다. 고염열매의 모양은 감과 똑같이 생겼으나 크기는 눈알 만하다. 그러나 그 나무 뿌리에 각종 감의 종자 가지를 붙이면 그 가지의 열매대로 감이 열린다.
필자가 10년 전 전남 함평 어느 산골에 가서 얼마 동안 살던 때가 있었다. 그때 그 산에서 한 나무에 여러 종류의 감이 달린 것을 보았다. 이유인즉, 한 노인이 감나무 한 그루에 가지마다 여러 가지 다른 종류의 감종자를 접붙였다. 그랬더니 이 쪽에는 홍실감, 저쪽에는 단감, 다른 쪽에는 떡감, 각 가지마다 다른 종류의 감이 열렸다. 이것은 뿌리는 하나인데 가지는 각각 다르기 때문에 다른 종류의 감이 열린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영적으로 우리는 돌감람나무인데 참감람나무에 접붙이는 비유가 있다. 세상 적인 절차로 본다면 뿌리가 좋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가지가 좋아야 하는데 성경에 기록된 것은 세상 적인 것과 정반대로 뿌리는 좋으나 가지는 나쁘다. 그러면 뿌리가 아무리 좋아도 가지가 나쁘기 때문에 나쁜 열매가 맺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마태복음에는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다”고 했다. 예수님이 좋은 나무이므로 예수 안에 있으면 좋은 열매가 맺어져야 할 것이 아닌가? 그렇지만 열매는 가지에 따라 맺는다. 그렇다면 이 두 가지 문제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나는 이 문제를 고심하면서 살폈는데 성경에서 말하는 접붙임은 외적 열매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뿌리로부터 내적으로 흘러 들어가는 진액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 되었은즉”(롬11:17) 접붙인 가지는 그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가 되었다고 하였다. 그렇다. 우리는 예수님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가 된 것이다. 뿌리의 진액이 무엇인가? 뿌리가 가진 똑같은 진액, 즉 예수님이 가진 똑같은 영을 우리가 함께 받는 자가 된 것이다. 그러나 접붙임이 되어 진액은 똑같은 것을 받지만 외적 열매는 전과 별 차이가 없는 것이다. 접붙인 가지가 재래종이면 열매는 전과 똑같이 재래종인 열매가 맺어진다.
그와 같이 예수를 영접해서 예수님과 접붙임이 되었다 할지라도 외적인 행위의 열매는 똑같은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 믿으면 전혀 다른 사람으로 바뀌는 줄 아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외적으로 조금은 달라질지 모르나 근본적으로는 똑같다. 성질이 급한 사람은 예수 믿어도 성질이 급하고 성질이 느긋한 사람은 역시 예수 믿어도 똑같이 느긋한 것이다. 이를테면 구정물 항아리와 같다. 원래 구정물이 들어 있는 항아리는 가만히 두었을 때는 말간 물이 위에 떠오른다. 그러나 그것을 깨끗한 물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것을 막대기로 한 번만 휘저으면 구정물이 올라오기 때문이다.
우리 죄인들의 심성도 마찬가지이며, 거듭나고 구원받은 영혼도 마찬가지다. 누구든지 “나는 거듭났으므로 예수님 같이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은 스스로 속고 있는 것이다. 까닭 없이 애매하게 맞아도 가만히 있을 수 있는가? 이 세상에는 한 사람도 없다. 우리의 성품이 약간 자제되는 것뿐이지 근본적으로 변화되는 것은 아니다. 거듭나도 겉 사람은 그대로 있기 때문에 예수님에게 접붙여졌다 할지라도 외적 열매는 전과 똑같은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새로운 열매가 맺어졌으니 그것은 내적으로 들어온 뿌리의 진액 곧 예수님의 영이 우리 속에 있는 것이다. 밀감나무 뿌리에다 탱자나무 가지를 접붙이면 그 나무에는 탱자가 열린다. 그러나 외적으로는 탱자지만 내적으로는 밀감의 진액이 올라갔으므로 맛은 똑같은 것이 아니다.그러므로 접붙였을 때 일어나는 현상은 겉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속이 달라지는 것이다. 우리도 예수님과 접붙여지면 다시 말해서 예수를 영접하면 외적인 것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속이 달라진다. 이렇게 말하면 예수를 믿고도 육적인 것이 달라지지 않는단 말인가 하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 조금은 달라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를 영접하지 않고 다른 종교를 접할지라도 예수 믿고 달라진 것만큼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성령에 의한 것이 아니다. 예수 믿는 사람만 순교하는 것이 아니라 불교를 믿는 사람도 순교하며 그 밖의 다른 신을 믿다가 순교한 사람도 많이 있다. 그들이 좋은 열매를 맺은 것인가? 아니다. 율법적으로 볼 때는 좋은 열매라 할 수 있으나 하나님 보실 때는 좋은 열매가 아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 좋은 열매가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영혼이며, 구원받은 자가 또 다른 영혼을 구원받게 하여 하나님 앞에 열매가 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7장의 나무가 좋아야 좋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는 열매는 율법을 잘 지켜 얻어진 열매가 아니요, 하나님의 영으로 낳은 새로운 피조물 곧, 새로 탄생된 새로운 영적 생명인 것이다. 이 새로운 영적 열매는 어떻게 얻어질 수 있는가? 이는 예수에게 붙어 있어야만 얻어지는 것, 복음을 받아들여 예수를 영접할 때만 얻어지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빌1:11) 예수로만 의의 열매가 맺어진다. 그렇다면 이 열매는 어떤 열매인가? 10. 은혜로 얻는 결실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 도다”(골1:6)
내적인 생명의 열매는 복음을 듣고 은혜를 깨달아 열매가 맺어졌다고 하였다. 이 열매는 은혜의 열매이다. 율법을 지켜 나타나는 열매는 행위의 열매요, 복음을 믿고 맺어지는 열매는 은혜의 열매이다. 율법을 통해 얻어지는 행위의 열매는 노력으로 얻어지지만 은혜의 열매는 예수를 믿을 때 저절로 맺어진다.노력의 결과는 은혜가 아니요 삯이다.(롬4:4) 은혜란 거저 주는 것이다.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엡1:6)
그러므로 은혜의 열매를 맺으려면 생각 자체부터 바꿔야 한다. 우리는 은혜의 열매가 맺어져야 한다. 은혜는 거저 주시는 것이라 했으니 거저 받아야 한다. 거저 주는 것을 자기의 노력으로 얻으려 한다면 주는 자를 모독하는 것이다. 은혜의 열매만이 영생에 이르는 열매이다. 그렇다면 이 열매를 우리는 맺었는가? 앞으로 맺어야 할 것인가? 사람들은 이 열매를 맺으려고 온갖 노력을 다 기울인다. 그러나 우리는 열매를 앞으로 맺을 것이 아니라 이미 맺었다.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니라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롬6:21,22)성경은 믿지 않을 때에 무슨 열매를 맺었다고 하는가? 사망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제는 믿기 때문에 죄에서 해방되었으며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고 했다. 거룩한 열매가 맺어졌다는 말이다. 열매가 맺어졌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대로 하나님의 나라를 받게 된다.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마21:43) 열매를 맺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받는데 그렇다면 어떤 열매를 맺어야 하나님의 나라를 받을 수 있는가? “그 나라의 열매를 맺어야 받는다”고 했다. 그 나라의 열매가 어떤 것인가? 그것이 곧 영생에 이르는 열매이며, 행위의 열매가 아니라 은혜의 열매이다. 율법을 지켜서 얻는 열매가 아니라 믿음으로 얻는 열매이다. 외적인 열매가 아니라 내적인 열매이다. 사람의 힘과 노력으로 얻어지는 열매가 아니라 성령의 역사로 믿는 자에게 거저 주시는 열매이다. 앞으로 받을 미래의 열매가 아니라 믿는 자에게 이미 주어진 과거의 열매이다. 이것이 곧 “그 나라의 열매”이다. 이 “거룩함의 열매를 맺었다”는 말이 무슨 말인가? 이 말은 거룩한 예수님의 영이 우리 속에 들어왔다는 말이다. 즉 내 속에 새로운 생명이 탄생했다는 말이다. 이 열매는 겉으로 나타나는 열매가 아니요, 우리 속에 맺어지는 열매다.
이 열매는 성령을 통해 우리 속에 생명을 넣어 주는 열매인데 이것은 믿음을 통해서만 받을 수 있다. 알기 쉽게 얘기한다면 예수님을 잉태한 마리아가 주의 말씀을 믿을 때 처녀의 뱃속에 예수가 탄생했다. 이것이 하늘에서 주신 열매인 것이다. 이 열매는 마리아의 노력으로 생긴 것이 아니요, 율법을 잘 지키므로 생긴 열매도 아니요, 믿을 때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이 맺게 한 열매이다. 이와 같이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우리 속에 하나님으로부터 예수의 생명을 주신다. 이것이 “거룩한 열매요 그 나라의 열매”이다. 이 열매만이 천국을 얻을 수 있는 열매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열매는 예수 그리스도의 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저절로 맺을 수 없는 열매이다. 반드시 예수로만 얻어지는 열매이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4:12)고 했다. 한 예를 들어보자. 11. 씨를 통한 비유 수박 두 개가 있는데, 하나는 터져서 썩어 가는 수박이요, 하나는 방금 딴 싱싱한 수박이다. 이 두 개의 수박 중에 어떤 수박의 생명이 길까? 그것은 물어 볼 것도 없이 싱싱한 수박이다. 싱싱한 수박의 생명이 길다. 그렇다면 다시 묻겠다. 터진 수박에는 씨가 있고 싱싱한 수박에는 씨가 없다. 어떤 수박의 생명이 더 오래 갈까? 이번에는 반대로 터진 수박이다. 터진 수박은 씨가 있기 때문에 싱싱한 수박보다 생명이 더 긴 것이다. 그런데 이 두 개의 수박 중에 싱싱한 수박은 외적인 것이 단장되어 외적인 열매이고, 터진 수박은 외적인 열매는 없으나 내적인 열매, 씨가 있는 것이다.
바로 예수님이 요구하는 열매도 내적인 열매, 곧 우리 속에 있는 생명의 씨인 것이다. 이 생명의 씨는 율법을 아무리 잘 지켜도 생기지 않는다. 반대로 이 생명의 씨는 아무리 율법을 못 지켰어도 예수를 개인의 구주로 영접하면 생긴다. 예수님 옆에 십자가에 달린 강도는 율법을 하나도 지키지 못했다. 그러나 예수를 영접했으므로 아름다운 열매가 맺어졌다. 12. 강도가 맺은 의의 열매 “열매맺는 백성이 하늘 나라를 받는다”고 했으니 십자가의 강도가 하늘 나라를 소유하게 되었다면 그는 열매를 맺은 자이다. 그러나 율법적으로 볼 때 그는 열매가 하나도 없다. 그렇지만 그는 생명의 열매가 맺어졌으므로 율법의 열매가 없어도 도끼로 찍어 불에 던지우지 않는다. 그는 율법의 열매가 없으나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라고 제하여 버리지도 않는다. 그는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이며 나무로부터 공급된 열매를 맺은 가지이며. 성령의 열매가 맺어진 가지이다. 그러고 그는 열매를 맺었기 때문에 낙원을 허락 받은 것이다. 그런데 성경에는 한 가지 성령의 열매에 대하여 풀기 어려운 문제가 있다. 이제 결론적으로 이 문제에 대하여 검토해 보도록 하자.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5:22,23)
이 아홉 가지 열매는 성령의 열매이다. 성령의 열매는 성령을 받은 사람이 얻는 열매인데 이런 열매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외적으로 볼 때 그렇게 사는 사람은 한사람도 없기 때문에 한사람도 성령의 열매를 맺었다고 할 수 없다. 심지어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맺으라고 외치는 목사도 그 열매는 없는 것이다. 그러면 왜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천국 갈 수 있다고 강조하는가? 당신은 성령의 열매를 맺었는가?
우리는 이 성령의 열매를 맺으려고 얼마나 노력해 왔는가? 이 열매가 맺어질 수 있는가? 외적으로 이 열매는 맺을 수 없다.“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갈 5:19-21)
갈라디아서에는 두 가지 열매가 있다. 하나는 성령의 열매요, 하나는 육체의 열매이다. 이 두 가지 열매 중 성령의 열매를 맺으면 천국에 가고 육체의 열매를 맺으면 지옥에 간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당신은 어떤 열매를 맺었는가? 솔직하게 성령의 열매를 맺었다고 장담할 수 있는가? 육체의 열매에 대해서 당신과는 하나도 상관없이 깨끗하다고 생각하는가? 육체의 열매 중 몇 가지만 살펴보자. 당신은 시기심이 전혀 없는가? 당신은 분내는 일이 전혀 없는가? 당 짓는 것, 분리시키는 것, 원수 맺는 것, 이런 것들 중 하나도 걸리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는가? 이 외에도 로마서 1장 29절부터 보면 육체의 열매가 많이 있다. “불의, 추악, 탐욕, 악의,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 비방, 능욕, 교만, 자랑, 불효, 우매, 배약, 무정, 무자비”
이런 열매는 육체의 열매요, 사형에 해당하는 열매요, 성령의 열매가 아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이 육체의 열매가 하나도 없는가? 만약 하나라도 있다면 당신도 지옥에 간다고 할 수밖에 없을 것이 아닌가? 또한 육체의 열매가 하나라도 있다면 성령의 열매가 없는 사람이다. 성령의 열매가 없이도 천국 갈 수 있는가? 아니다. 성령의 열매가 있어야만 천국에 간다. 그렇다면 독자는 천국 갈 자신이 있는가?
13. 성령의 열매를 맺었나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 첫째는 사랑”인데. 독자는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하는가? 그렇지 못하다면 성령의 열매는 없는 사람이다. “희락과” 참된 즐거움이 있는가? “화평과” 참된 화평이 있는가? “오래 참음과” 오래 참는가? “자비와” 참으로 자비한 사람인가? “양선” 어진 사람인가? “충성과” 충성하는가? “온유” 온유한가? “절제” 절제란 모든 일을 알맞게 조절하는 것을 말한다. 기독교인이 부절제로 인하여 약하고 병들고 죽는 자들이 많다. 우리는 냉정하게 살펴보아야 한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 한 가지 열매라도 완전히 맺은 자가 있는가? 이 세상에는 한사람도 없다. 그렇다면 왜 이것을 기록했는가? 우리가 그 뜻을 바로 알아야 한다. 갈라디아서 5장에 나열된 성령의 열매나 육체의 열매는 열매의 종류를 말하고 있는 것이지 우리에게 이 열매를 맺으라고 요구한 말이 아니다. 다시 한번 그 말씀을 살펴보자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5:22.23)
위의 말씀은 이 열매를 맺으라고 한것도아니요 맺기 위하여 노력하라고 한것도아니다.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성령의 열매를 금지할 법이 없다고 했다. 이 말씀에 대한 것은 결론에서 검토하겠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여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있을까? 분명히 육체의 열매를 맺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고 했는데 독자는 무슨 열매를 맺었는가? 만약 육체의 열매를 하나라도 맺었으면 독자도 지옥 갈 수밖에 없지 않은가?
누가 이 아홉 가지 성령의 열매를 모두 맺을 수 있는가?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하다. 이 열매를 온전히 가진 자는 예수님밖에 없다. 이 열매를 맺었는가? 맺으려 하고 있는가? 이 열매는 성령의 열매인데 구원받은 자는 이미 이 열매를 맺은 자이다. 어떻게 성령의 열매를 맺는가? 자기 노력으로 맺을 수 있는가? 아니다. 성령의 열매는 믿음으로 얻는다.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갈3:2) 믿음으로다. 그렇다면 우리는 믿고 있으니 성령을 받은 것이 아닌가?(갈5:25)
그렇다! 우리는 믿고 있으니 성령을 받은 사람이다. 우리 힘으로는 아홉 가지 열매를 맺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오신 것이며 예수님이 맺으신 열매를 우리에게 주시고 우리가 맺은 저주의 열매는 예수님이 가져 가셨다. 그러므로 나는 예수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었으나 예수님은 나의 죄로 저주를 받은 것이다.“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갈3:13)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았다고 하셨다. 그리고 우리를 속량하셨다. “속량”이란 죄인을 사서 양민으로 놓아주는 것을 말한다. 우리를 양민 되게 하셨다. 다시 말해 죄인을 사서 의인되게 하셨다는 말이다. 어떻게 의인이 될 수 있는가? 예수님이 가진 의를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에 의인이 되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5:21) 예수 안에서 의인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의롭게 살아서 의인이라 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예수님의 하신 모든 의를 우리에게 주셔서 의인이라 하는 것이며 예수님이 맺으신 성령의 열매도 예수님이 우리에게 거저 주셔서 우리가 열매를 맺은 것으로 인정하신다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열매를 맺은 자이다. 이것은 나의 노력으로 율법을 지켜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구속을 믿어서이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 22절에서 성령의 열매를 말한 후에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고 하셨다. 이 말씀은 성령의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할 법이 없다는 말씀인데 다시 말해서 법으로는 성령의 열매가 맺어지는 것을 못 맺게 할 수 없다는 말이다. 왜 그런가? 이 열매는 율법을 지켜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얻어지기 때문이다. 당신이 예수님의 대속을 믿는다면 이미 성령의 열매를 맺은 자이기 때문에 법으로는 금할 수가 없다는 말이다.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고 나서 바울은 다음절에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갈5:24)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욕심과 정욕을 십자가에 못박았다고 하였는데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가? 예수를 영접하고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이다. 십자가의 구속을 완전히 받아들이고 예수님의 공로를 내 것으로 인정한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은 육적인 것을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아 버렸다. 그러므로 바울은 육체의 열매를 맺은 옛 사람은 십자가에서 이미 예수님과 같이 죽었다고 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2:20)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람이 육체와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을 것이라고 하지 아니하고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고 하여 이미 우리는 모두 죽어 있는 사람으로 과거 시제를 사용하고 있다. 앞으로 못박을 것인가 아니면 이미 못이 박혀졌는가? 우리는 이미 못을 박았다. 그러므로 과거의 죄된 사람은 죽고 새사람으로 살아났으며 과거의 사람이 예수와 함께 죽을 때 육체의 열매는 죽었고 예수와 함께 살아나 예수와 함께 성령의 열매를 맺은 사람이 되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맺은 성령의 열매는 나의 것이 되었다. 예수님의 의도 나의 것이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로 나에게 주신 성령의 열매를 맺지 못하게 금지할 법이 없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성령의 열매를 맺은 사람이다. “이제는 너희가 죄에서 해방되고…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롬6:22)
이제 우리는 거룩한 열매를 맺은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마지막은 영생이다. 이제 영생을 얻기 위하여 열매를 맺으려고 하지 말라! 이미 우리는 열매를 맺은 사람들이다. 이 열매는 행위로는 맺을 수 없고 믿음으로만 맺을 수 있다. 어떻게 믿는 것인가? 내 죄의 열매는 예수님이 가져가고 예수님의 열매는 나에게 주었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하고 피흘리는 경건의 싸움을 싸울지라도 하나님이 원하는 열매는 맺을 수 없다.
오직 한 길, 믿음으로 예수님의 열매를 가져오는 것밖에 없다. 필자도 행위의 열매를 맺으려고 노력해 보았다. 사람들을 피해서 산중 생활도 해보았으며 채식만을 하며 경건을 연습해 보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한 가지 열매도 맺지 못하고 실패하고 말았다. 행위의 열매를 맺는 것은 인간으로는 불가능하다. 오직 십자가의 능력만이 우리로 열매를 맺게 한 것이다.
성령의 열매는 의의 열매요, 영생의 열매인데 오직 예수로만 얻어지고 믿음으로만 얻어지는 믿음의 열매요, 반대로 행위의 열매는 율법의 열매요, 죄의 열매요, 사망의 열매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완전한 행위의 열매를 얻어야 천국 간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죄로 인해 사망 곧 불 못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믿음의 열매는 영생을 얻느냐 사망을 당하느냐 하는 문제가 달려있고, 행위의 열매는 칭찬을 받느냐 매를 맞느냐 (상벌) 하는 문제가 달려 있다. 만약 행위의 열매가 구원 문제에 달렸다면 이 세상에는 구원 얻을 자가 한 사람도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서는 행위의 열매가 좋은 사람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행위가 좋은 사람이나 나쁜 사람이나 모두 불합격이요, 일을 잘한 자나 못한 자나 모두 불합격이므로 하나님께서는 행위의 열매로 우리를 구원하려 하지 않으시고 믿음의 열매로 구원하려 하는 것이며 그것이 믿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적 열매는 행위의 열매가 아니라 은혜의 열매이다. 은혜는 거저 주는 것이므로 누구든지 거절하지 않고 받기만 하면 얻어진다.
우리는 지금까지 나쁜 나무이면서 좋은 열매를 맺으려고 노력해 왔다. 그러나 나쁜 나무는 절대로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 나쁜 나무의 뿌리를 잘라 버리고 좋은 나무에 가서 접붙임이 되어야만 좋은 열매가 맺어질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나쁜 나뭇가지를 좋은 뿌리에 접붙여도 열매는 똑같은 열매를 맺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뿌리에서 올라가는 진액은 다르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에게 접붙임이 되었을 때 외적 열매가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내적 열매가 달라지는 것이다. 그 내적 열매가 무엇인가? 그것이 곧 속에서 역사 하는 성령이요, 성령의 열매요, 영생의 열매인 것이다. 그러나 외적으로는 아무리 좋은 열매를 맺어도 속에 생명의 열매가 없으면 죽어버리고 만다. 이것은 씨 없는 수박과 같다. 믿는 자들은 속으로 성령의 열매를 맺은 사람인데 이것은 행위로 된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된다고 갈라디아서에 기록되었다.
그러므로 믿으면 누구든지 성령을 주셔서 열매 있는 사람으로 여기시고 하늘까지 데려간다. 세례 요한이 강하게 외치기를 “누구든지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면 찍어 불에 던지우리라”고 했다. 그러나 좋은 열매 맺으려면 좋은 나무에 붙어야 한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7장에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안다”는 말씀은 속은 없는데 겉만 열매가 있는 것 같이 여기는 바리새인들에게 한 말이다. 지금도 역시 바리새인과 같이 율법을 잘 지켜서 거룩한 열매를 얻으려고 하는 자들은 바리새인과 똑같이 열매가 없는 자들이다.
돼지가 깨끗한 삶을 살 수 있는가? 돼지는 아무리 깨끗하게 씻겨 놓아도 시궁창에 들어간다. 그러나 양은 씻지 않아도 시궁창에 들어가지 않는다. 왜 그런가? 종자가 다르기 때문이다. 돼지가 양의 마음을 가지려면 어떻게 하면 되는가? 그것은 심장을 바꾸어야 한다. 한 마디로 속에 들어 있는 내장들이 바뀌어져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아무리 깨끗해지려 해도 깨끗해지지 않는다. 깨끗해지려면 내 속에 성령이 오셔서 예수의 심장으로 바뀌어져야 한다.
예수에게 접붙여지면 예수의 심장이 되고, 예수의 열매가 저절로 맺어진다. 우리의 노력으로는 겉이 깨끗해질 수도 없지만 깨끗해진다 해도 겉은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다.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고전15:50) 어떻게 해야 열매를 맺을 수 있는가? 예수를 믿고 예수를 영접하는 길밖에 없다. 우리가 깊은 구덩이에 빠졌는데 우리의 힘으로 올라오지 못하니까 예수님께서 우리의 손을 잡고 건져 주셨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스스로 열매를 맺으려 하지만 기독교는 하나님이 해주신 것으로 열매가 맺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이 거저 주셨으니 이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할 법이 없다.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포도나무의 가지는 포도나무에 붙어 있기만 하면 된다.
열매는 가지가 맺는 것이 아니라 나무가 맺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에게 붙어 있기만 하면 된다. 예수에게 붙어 있으면 성령의 열매가 맺어지고 그것으로 구원받게 된다. 행위의 열매는 우리의 힘으로 맺어질 수도 없지만 만약 맺어진다 할지라도 그것은 이 세상에 있는 날 동안만 필요하고 죽으면 끝나 버린다. 그러나 믿음의 열매는 영적 생명의 탄생이므로 죽은 후에도 우리를 살게 해서 천국에서 영생을 누리게 한다. 모든 독자들이 이 열매를 맺어 영원히 살게 되기 바란다.
위의 내용은 생명의 원자탄이란(일명 난해구절복음적해석) 책에 기독되어 있는 여러 제목들 중 일부이다
서울총회신학 학장 김수영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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